인간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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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gust 30, 2018

인간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가치 있는 것은 단지 인간이기 때문이지, 그가 인생 중에 무엇을 잃거나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이것을 부정한다면, 왜 객관적인 인권이 모두에게 적용되는지를 이야기할 수 없다.

전인적 인간

다시 살펴 보자면, 생명 옹호론자들은 태아는 아주 초기 단계부터 분명히 살아있는 한 유기체로서의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태아는 커다란 인간의 한 부분이 아니라(어떤 피부 조직처럼), 스스로 성장과 발전을 주도하는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생명 운동가들은 신학을 통하여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태아학이라는 과학을 통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사실 과학은 우리가 어떻게 태아라는 인간을 취급할지를 말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과학은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말해 주지 않는다. 아내를 때리고, 다음에는 걸음마 아기를 고문하는 것이 옳은가? 이런 질문에 과학은 도움을 주지 못한다. 또 왜 태어나지 않은 아기가 (그런면에서 모든 인간이) 살 권리가 있는지도 말해주지 못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과학 자체로는 생명 운동을 정당화시켜 주지 못한다. 단지 낙태, 줄기세포 연구, 복제, 등 논란의 와중에서 사실은 알려 줄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첫 단계는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존재에 대한 생물학적 특성에 대한 올바른 과학적 사실을 천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이러한 사실들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들이다. 태아 연구서는 모두 인간의 생명은 잉태와 더불어 시작된다(또는 성공적인 복제 과정 후에)는 것을 일관되게 가르치고 있다.

종교 문제

이 관점에서 어떤 낙태론자들은 “아무도 종교적 형이상학적 설명 없이는 배아나 태아가 귀중한 한 인간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고 하면서 논쟁을 끝낼 것을 요구하고 나선다.

그렇다, 옳은 말이다:배아가 정말 가치 있다는 주장이 인간의 권리와 가치가 초월적 사고의 시작이라는 세계관에 근거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런 세계관은 분명한 오류이다.

첫째로, 배아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주장은 5살 난 아이가 가치 있다는 주장처럼 전혀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Ramesh Ponnuru 는 이렇게 주장했다:

 

“낙태에 대한 생명 운동가들은 8주된 태아나 10일 된 아기는 동등한 것으로, 태아를 죽이는 것을 정당화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열흘된 아기를 죽이는 것을 하나님이 금하신다고 믿으며, 신학을 떠나서라도 그런 살인을 정당화할 아무 이유도 제시하지 못한다. 아기를 죽이는 일이 본래적으로 종교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 (The Party of Death, p. 82)

정말, 완전히 물질적인 유물론적 세계관이 우리들에게 왜 어떤 것이 가치가 있고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해 줄 수 있을까? 유물론에 의하면 인간과 그가 가진 이성까지도 포함한 우주의 모든 것은 우연히 물리적 과정 중에, 그리고 무작위 기회로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 우주는 무에서 나왔고, 아무 이유 없이 발생했다. 기껏해야 인간은 우주의 우연한 사고로 발생한 것이다. 이런 비참한 설명 앞에서 세속학자들은 단지 인간의 존엄성, 권리, 의무 등을 가정할 뿐이다. 그러나 어떤 자연주의적 근거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확신된다는 말인가?

둘째로, 생명운동가들의 관점이 어떤 특정 종교적 관점(기독교 신관, 보수 유대교, 이슬람 등)과 일치한다고 하여, 그것 만으로 논쟁을 잠재울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종교적 가르침은 이유가 있어야 한다. 걸음마 아기를 재미로 죽이는 일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기 위하여 교회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그런 아기를 학대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장황한 세속적 논리를 전개하려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이런 도덕적 진리와 이성적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을 금지하지 못한다.

세째로, 생명운동가들의 견해가 진정으로 종교적(생명운동가들은 불신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합리적 이유를 들어서 자신의 견해를 변호할 수도 있다)이라 가정하더라도, 왜 사람들은 종교적 진리가 주장하는 바를 참 지식으로 여기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런 형이상학적 주장의 증거는 무엇인가? 한 예를 들어, 역사적 기독교는 맹목적 신앙을 강요하지 않고, 증거에 기초한 신뢰(지식)을 가르친다. 우리는 신약 전체를 통해 이런 것을 본다

 

  •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 행17:2-4—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또 행2:32, 36, 행1:3, 막2:10-11을 보라)

간단히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이며, 실제에 높은 가치를 둔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잘 이야기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웃음거리에 불과할 것이다(고전15:1-15).물론 기독교의 신관이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잘못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합리적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네번째로, 종교를 빙자하여 반대하는 것은 논쟁이 아니라 낙태 반대자들을 싸잡아 몰아치는 몽둥이다. 법학자 Mary Ann Glendon 은 왜 시민들이 낙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지 못하고 숨겨야 하느냐고 반문한 것은 마땅한 일이다. 사람들은 월남전, 사형제도, 시민의 권리, 가난 등에 대하여는 종교에 근거한 윤리 도덕으로 자신의 견해를 서슴없이 발표하지 않는가?

그러나 자유주의 사상가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내가 아는 대부분의 보수 종교인들은 교리를 시민에게 강요하는 신정(神政) 체제나 기독교 국가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국가란 것은 종교, 성, 인종, 크기, 거주지, 장애여부 등에 상관없이 아무 시민도 기본 인권에 침해를 받지 않는 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법을 좌지우지하는 권위 있는 판사가 아니라 법을 준수하는 재판관을 원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사상가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내가 아는 대부분의 보수 종교인들은 교리를 시민에게 강요하는 신정(神政) 체제나 기독교 국가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국가란 것은 종교, 성, 인종, 크기, 거주지, 장애여부 등에 상관없이 아무 시민도 기본 인권에 침해를 받지 않는 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법을 좌지우지하는 권위 있는 판사가 아니라 법을 준수하는 재판관을 원한다.

기본으로 돌아가자

슬프게도 현대 법조인들은 이전 국가 초기의 법학자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2가지 기본 진리를 잊어버린 것 같다. 하나는, 정부의 목표는 무슨 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자연적으로 갖고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이요, 둘째는 도덕적 실재주의(옳고 그르다는 것은 실재적인 것이지, 인간의 견해나 문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논리)를 인정하지 않고는 일반적으로 옳고 진정한 인권에 대하여 진지하게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도덕적 진리가 법의 기초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법 자체는 단지 거치른 정치적 권력 조직에 불과한 것으로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는 것이다.

도덕적 중립이란 가능한 것이다. 낙태 찬반 토론에서 쌍방은 모두 형이상학적 근거를 제일 먼저 도입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자유주의자들이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 대한 상황을 형이상학적 견해를 근거로 낙태법을 제정하려는 것은 괜찮고, 생명운동가들이 같은 근거로 방지법을 주장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일까? 생명운동가들은 그들이 견해를 강요하며 협박하지 않고(소수의 극렬분자들이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오직 제안하여 각계 각층의 모임에서 투표권자들이 어떤 수준에서 법을 만들어 가도록 찬성 투표를 하도록 하려는 것뿐이다. 이것이 민주주의 아닌가?

악한 일이지만 허락하라고?

2006년6월 U.C. Davis 논쟁에서 여러 번 낙태 수술을 한 경험이 있는 여의사 Meredith Williams 박사는 낙태법이 통과되지 않는 한 자신은 낙태란 비극적인 것이며 자신도 그런 시술의 회수를 줄이고 싶다고 심정을 거듭 피력했다.

그러나 왜 낙태가 비극적이고, 왜 그녀는 시술 회수를 줄이고 싶은지 그녀는 말할 수 없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그녀가 한번 이상 논쟁 중에 언급한 바대로 만약 태중의 아이가 “기생충”에 불과하다면, 그런 기생충을 제거하는 것이 잘한 것이지 비극적이라는 이유가 되겠는가? 낙태를 많이 할수록 좋은 일 아닌가! 그녀는 이율배반적인 궁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 논쟁 내내 그녀는 과연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절대적 자유를 가졌는지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처음 토론에서 그녀는 그런 자유가 다소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목조목 대질 형식의 질문과 더불어 내가 의사 Rich Poupard의 질문을 들이대자 그녀는 물러 섰다.

 

한 여성이 고통스런 현기증과 구토로 고생하면서 제발 증상을 없애기 위해 탈리도마이드를 처방해 달라고 조른다고 하자. 그 약이 태아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안되다고 해도 그녀는 계속 태중의 아기는 어떻든지 내 몸에 아무 권리가 없다며 약을 달라고 한다. 의사가 약을 끝내 거절하자 그녀는 다른 방법으로 약을 구해 먹었고 결국 그 아기는 양팔이 없이 태어났다. 그녀는 잘못한 일이 없는가? 그녀가 자신의 몸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가졌으니 우리는 그의 행위를 용서해 주어야 할 것인가? 결국 태중 아기는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이고 살아야 할 권리도 없이 무균실에 버려두어야 할 것인가!

그 여인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는 여의사의 답변에 나는 “그러니까 그 어머니가 약을 먹어 해를 가한 것은 잘못이고, 아기를 죽이기로 선택하는 것은 옳다는 말인가?”라고 되물었다.

기자 출신의 Christopher Caldwell는 이렇게 요약했다: “생명운동은 미국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야 한다고 느끼는 것 뿐이다” 그들이 낙태를 허용하지 않지만, 그것은 부비 트랩처럼 안 보이는 곳에 잠복하도록 방임하여 낙태를 전면 금하는 결과에 이르지 않게 한다. 미국인들은 낙태를 반대하여 자신의 도덕적 입장을 천명하면서 동시에 그런 일을 방임하고 있다. (“Why Abortion is here to Stay,” The New Republic, 4-5-99.)

그 여의사는 낙태법이 예외없이 전면 시행되고, 낙태 시술이 드물게 시술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종교나 윤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단지 개인적 영역에서 역할을 할 것이고,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Caldwell이 “이것은 생명운동의 입장이 아니다”라고 한 말은 옳다. 그것은 낙태 문화의 자유를 인정하는 말뿐인 도덕 윤리에 불과하다.

하나님 없이 퍼지다

그렇다. 이런 논리들이 존재하고, 나는 이것들을 이용하여 낙태와 싸운다. 그러나 그들의 형이상학적 논리는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Paul Copan이 지적하듯이 이전의 무신론자들은 인간의 존엄성, 인권, 도덕적 책임 등을 설명하기 위하여 존재론적 근거를 풍부히 제안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들은 그냥 이런 것들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어떤 자연적 근거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이 확립된다는 말인가? 우리들은 단지 우연한 자연 발생의 결과가 아닌가? 그렇다, 무신론자들도 도덕적 진리를 인식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도덕적 요구를 존재론에 근거하여 설명하지는 못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은 왜 사람들이 낙태나 다른 도덕적 문제에서 올바르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마지막 보루

유신론적 우주관이 인간의 권리와 존엄에 대하여 더 나은 설명을 해 준다. 유신론자가 보기에, 인간이란 고유한 가치를 지닌 존재이며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동시에 객관적인 도덕 윤리가 의미 있는 것은, 도덕 윤리가 그것을 주신 분의 품성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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